뮤지션들의 합리적인 선택
이스트만 올솔리드 기타 E10OOSS/V


악기 연주를 하지 않는 분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문화가 있습니다. 특히 현악기의 경우 오래 사용해서 닳은 듯한 에이징 처리를 한 악기가 새것 같은 상태의 악기보다 멋스럽다고 인식되어 왔고, 일렉기타의 경우도 이런 문화가 자리잡아있죠. 심지어 더 비싸기까지 합니다.
악기 외에는 빈티지 워싱이 들어간 청바지나, 골든 구스 같은 몇몇 운동화를 제외하고는 이런 문화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저렇게 낡아 보이는 것을 웃돈을 더 주고 구입한다니 참 독특한 문화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정말 애정하는 브랜드인 이스트만에서는 일반적인 모델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모델이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기타리스트 적재씨가 사용해서 잘 알려진 모델이죠. 바로 E10OOSS/V입니다.

이 모델이 일반적인 기타들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은 바로 악기의 겉면인 ‘칠’에 있습니다. 앤틱 바니시라고 불리는 형태의 이 피니시는 흔히 볼 수 있는 유무광 락카 피니시나 우레탄 피니시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죠. 바로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 클래식 현악기에서 주로 보던 모습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칠의 종류나 형태, 방식 등은 악기의 울림에 있어 정말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기타의 경우 락카 등의 1액형 혹은 우레탄 계열의 2액형 피니시를 스프레이로 고르게 분사하여 도포하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바이올린 등의 현악기는 천연 소재의 오일 바니시 등을 붓이나 면포 등으로 고르게 바르는 방식을 이용합니다. 이때 옅은 색부터 짙은 색까지 적어도 수십번 이상 얇게 발라, 나뭇결이 잘 나타나면서도 심도 깊은 색을 얻어내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보통의 기타 피니시가 2~3개의 레이어가 겹쳐진 것이라면, 바이올린 등의 현악기는 수십개의 레이어가 쌓이게 되어 깊이 있고 복잡한 색감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일부 클래식기타에서도 바이올린처럼 쉘락이라는 소재를 면포에 묻혀 바르는 방식의 칠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바이올린과 방식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간소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업할 경우 일반적인 락카 피니시보다 더 얇게 입혀져 공명이 증가하고 열린 사운드를 얻게 되어 더욱 감미롭고 부드러운 표현력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악기 제작자가 아니기 때문에 실험을 통해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작업기간과 공임, 생산단가가 엄청나게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클래식 악기들이 이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음색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스트만의 앤틱 바니시 모델 역시 이러한 장점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시도한 것인데, 예전 이스트만 소개 영상에서 중국 현악기 시장의 최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Eastman Strings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었죠. 30년 이상 현악기를 제조하며 얻게 된 생산 노하우를 풀할로우나 플랫탑 스틸 스트링 기타 등에 적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갓 만들어진 바이올린이지만 오랜 기간 사용한 것처럼 연출했던 공법들도 기타에 적용시켰습니다. 몸이 직접적으로 많이 닿는 부분의 칠 변형이나 튀어나온 부분의 스크래치, 모서리의 변색 등 최소 수십년 이상 사용한 것처럼 보여지게 만드는 표현 기법들이 바니시 칠과 만나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니트로 셀룰로스 락카를 사용한 기타 중에 펜더 커스텀 모델처럼 레릭 처리가 되어있는 일렉기타나, 마틴의 AGED 모델, 영국 브랜드인 앳킨 등의 플랫탑 스트링 기타 일부 모델에서도 오래 사용한 것 같은 처리가 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히 고가이고, 이스트만의 바니시 칠 정도로 입체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바니시의 단단하지 않은 칠의 속성 때문에 실제 내가 사용함에 있어 발생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에이징 처리까지 더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만의 연주 역사까지 더해지게 되면 비로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악기가 되는 것이지요.

음색은 00바디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드레드넛이나 OM바디에 비해 사이즈가 작기 때문에 음량도 작고 풍성한 맛이 덜합니다. 이 모델 역시 묵직하거나 풍부한 저음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막상 연주해보니 반응성도 빠르고 열려있는 듯한 울림을 가지고 있어 상당히 재미있는 악기네요. 의외로 프로 기타리스트나 다양한 기타를 많이 만져보신 분들이 좋아하는 바디가 이런 형태인데, 여러 터치에도 섬세하게 반응할 수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이스트만의 인기 모델인 E1OM, E8OM-TC, E20OM-TC등과 달리 E10OOSS/V 모델은 상당히 실험적이고 매니악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크게 인기가 없는 바디 형태와 한번도 본 적 없는 칠의 형태, 과감한 컬러 사용, 꽤 높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되고 있다는 사실이 악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꽤 반가운 일입니다.